양양 김택준 가옥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남면 두리(斗里)에 위치한 경주김씨 상촌공파 두리종중의 종택으로, 마을 내에선 주로 큰집(大宅)이라고 불렸다. 종택은 조선 후기 18세기 초 입향조인 김여경(金如瓊, 1682년?~?)에 의해 처음 지어졌는데, 김여경은 양양읍에 거주하던 상촌공파의 후손으로, 이 시기에 현남면으로 내려와 두리 일대의 숲을 개척하여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김여경의 5대손인 김도철(金道喆, 1769년~1812년) 대에 이르러서는 기와집이 12칸이었으며, 논이 482마지기, 밭이 202마지기에 노비 7명을 두었다고 『종가실록(宗家實錄)』에서 기록하고 있다.
멀리서 본 김택준 가옥 전경
이후 1804년(순조 4) 3월 강원도 영동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이 두리 일대까지 번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의 산불은 왕에게 보고될 정도의 큰 불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에 따르면 산불이 강원도 삼척에서 통천까지 200여km를 이동하며 민가 2천 6백여 호와 사찰 6곳을 불태우고 61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 이 산불로
종가에 소장하던 입향조 김여경과 장남 김준태(金俊泰, 김한태)의 가자(加資, 관직과 품계를 올려주는 증서), 현손(玄孫) 김도철의 홍패(御賜紅牌)를 포함해 모든 문권(文券)과 협물이
불타게 되는데, 가옥 역시 이때 전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도철이 가주(家主)일 때의 일이다. 해당 사실은 화재 직후 김도철이 양양부 관아에 올린 소지를 10대손인 김규하(金圭夏, 1881년~1934년)가 『종가실록』에 필사해두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종가실록』 6페이지 — 김도철 소지(所志)
현남면에 거주하는 김도철이 올리는 소지
이는 삼가 소지로 말씀드리는 일입니다. 저의 집이 금년(1804년) 3월 화재로 인하여 집안에 보관하던 협물과 대대로 전해오던 전답의 문서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불타버렸사옵니다. 이에 땅의 자호(字號)와 면적(卜數)을 뒤에 기록하여 우러러 호소하오니, 굽어살피시어 훗날의 증빙이 되도록 사리를 논하여 입지(立旨)를 작성하여 발급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사또 나으리(使道主)의 처분을 바랍니다. 초8일 [인]
금년의 화재는 전례가 없던 큰불이었습니다.
(양양부) 관아
갑자년(1804년) 3월 일 훗날 상고할 수 있도록 입지를 작성하여 발급하도록 할 일.
뒤에 기록함
논 482마지기는 (너무 많아) 낱낱이 다 기록할 수 없는 바다. 밭 202마지기는 낱낱이 다 기록할 수 없는 바다.
이는 삼가 소지로 말씀드리는 일입니다. 저의 고조이신 가선대부 증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의 가자(加資)와 증조이신 자헌대부 행 동지중추부사의 가자, 이 두 장이 금년 3월
화재가 나면서 집에 보관하던 것과 아울러 불타 재가 되었사온 바, 이러한 연유로 우러러 호소하오니 굽어살피시어, 훗날 상고할 증빙으로 삼을 수 있도록 입지를 작성하여 발급해
주시기를 처분하여 내려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사또 나으리의 처분을 바랍니다. 초8일 [인]
(양양부) 관아
갑자년 12월 일 소지에 대하여, 훗날 상고할 수 있도록 입지를 작성하여 발급하도록 할 일 [인]
이는 삼가 소지로 말씀드리는 일입니다. 저는 지난 신유년(1801년) 도과(道科)에 참방(합격)한 출신이온데, 임금께서 내리신 홍패(御賜紅牌)가 금년 3월 화재가 나면서 집에
보관하던 것과 아울러 불타 재가 되어버렸사옵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야흐로 병조(兵曹)에 올라가 완문(完文, 관청의 공식 증명서)을 작성하여 처리(계료)받고자 하오니, 굽어살피시어
훗날 증빙으로 삼을 수 있도록 입지를 작성하여 발급해 주시기를 처분하여 내려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사또 나으리의 처분을 바랍니다. 초8일 [인]
(양양부) 관아
갑자년 12월 일 소지에 대하여, 증빙으로 삼을 수 있도록 입지를 작성하여 발급하도록 할 일. [인]
김도철의 장남 김주형(金胄衡, 1786년~1863년)이 가주였던 1841년의 『종가실록』 기록에는 김주형이 상선(商船) 사업의 실패로 발생한 막대한 채무 때문에 12칸 기와집(瓦家十二間)과 그 집터를 강릉의 이진사댁에 봉상(捧上)한다는 명문이 등본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재 이후 1840년경 이전에 이미 가옥을 12칸 규모로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주형의 차남 김의성(金義聲, 1817년~1887년)의 노력으로 해당 빚을 모두 갚은 것이 1846년이었으며, 그로부터 34년 뒤인 1880년의 기록이 고종 연간에 제작된 『경주김씨파보(慶州金氏派譜)』의 표지 뒷면에서 발견되었다.
『경주김씨파보』 성조택일기(成造擇日記)
(좌향은) 술좌진향(서북서를 등지고 동남동을 향함)이며, 경진년(1880년)은 백랍금(金) 운에 해당한다.
가주(家主, 김동영)는 무술(1838년)생이며, (납음오행은) 평지목(木)이다.
안공(安工, 착공)은 정월 22일이다.
파옥(破屋, 옛집 헐기)은 동월 29일이다.
개기(開基, 터닦기)는 2월 초4일 오시(午時)에 하되, 오방(午方, 남쪽)부터 먼저 판다.
정초(定礎, 주춧돌 놓기)는 동월 초6일 오시에 하되, 위쪽 주초(上礎)부터 먼저 놓는다.
입주(立柱, 기둥 세우기)는 2월 초10일 인시(寅時)에 하되, 위쪽 기둥(上柱)부터 먼저 세운다.
상량(上樑, 마룻대(종도리) 올리기)은 동월 14일 신시(申時)에 한다.
입주국(立柱局, 기둥을 세우는 시각의 사주와 오행 배치) : 경진년(金)·기묘월(土)·무신일(土)·갑인시(水)
상량국(上樑局, 마룻대를 올리는 시각의 사주와 오행 배치) : 경진년(金)·기묘월(土)·임자일(木)·무신시(土)
입택(入宅, 입주)은 3월 초9일 진시(辰時)이다.
경진년(1880년)성조가O술O진내OO
가주(家主, 김동영)는 무술(1838년)생, 배위(坤, 계배 김해김씨)는 병진(1856년)생이다.
2월 초2일 경자일, 안공(按栱, 공포 짜맞추기)에 착수한다.
훼옥(毁屋, 옛집 헐기)은 2월 11일 기유일 사시(巳時)에 하되, 오방(午方, 180°)부터 먼저 헌다.
개기(開基, 터닦기)는 동월 16일 갑인시(甲寅時)에 하되, 오방부터 먼저 판다.
정초(定礎, 주춧돌 놓기)는 동월 21일 기미일에 하되, 갑방(甲方, 75°)과 해방(亥方, 330°)부터 먼저 놓는다.
입주(立柱, 기둥 세우기)는 동월 26일 갑자일 사시 또는 인시(寅時)에 하되, 사방(巳方, 150°)부터 먼저 세운다.
상량(上樑, 마룻대(종도리) 올리기)은 동월 27일 을축일 사시에 한다. (묘시(卯時)는 좋지 않다.)
입택(入宅, 입주)은 3월 초9일 병자일, 길일이다.
해당 기록은 성조택일기(成造擇日記)로, 가옥을 새로 지을 때 안공(安工, 착공)부터 입택(入宅, 입주)까지의 모든 공정의 길일·길시·방위 등을 지관이 산정해 적어둔 문서이다. 표지 뒷면의 위아래로 두 안의 택일기가 적혀 있으며, 아래의 제2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택일기에 따르면, 1880년의 가옥 신축은 기존에 있던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짓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이때의 가주는 김지성(金志聲, 1812년~1844년)의 양자로 출계한 김의성의 장남 김동영(金東永, 1838년~1902년)이었다.
위 택일기를 바탕으로 1880년에 재건한 현재의 안채 건물의 연대를 계산해보면 대략 150여년이 된다. 이때 중건된 안채의 규모는 보는 시각에 따라 6칸 ~ 11칸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데, 부엌 앞뒤의 부속채(고방, 마구간)와 사우방을 제외한 'ㅡ'자 형태의 팔작지붕 와가로 지어졌다고 가정하면 6~8칸으로 그 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안채 구조에서 부엌 앞의 부속채를 제외한 'ㄴ'자 형태의 7칸~9칸 규모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종가에서 소장 중인 광무 3년(1899년)~광무 10년(1906년)의 호적표(戶籍表)에는 종가에 대해 '기와집 6칸(瓦 六間)'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전체 칸 수를 기재한 것인지 살림공간만을 기재한 것인지 그 기재 기준을 알 수 없어 이를 통해 당시 가옥의 정확한 칸 수를 추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또한, 종가에서 소장중인 광무 호적 15본 중 1본(김희열, 초가 2칸)을 제외한 14본(종가, 작은댁, 웜집, 베메집)에서 가옥의 칸 수를 '와가 6칸' 또는 '초가 6칸'으로 기재하고 있어 당시 '6칸'이 형식적인 기재였는지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호적에 기재된 칸 수는 실제 가옥의 칸 수를 추정하는 근거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해보인다. 하지만 호적 기재의 신빙성과 별개로 확실한 것은 1880년의 가옥 재건이 기존 12칸 규모에서 다소 축소된 규모로 진행되었다는 점으로, 이를 통해 1846년의 채무 상환 이후 종가의 재정규모가 축소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물론, 위 단락의 내용은 추정이며, 1880년 재건 당시나 그 이전 가옥의 칸 수나 건물 구조는 자료의 부재로 명확히 알 방법이 없다. 위 단락에서 1880년 재건 당시에 안채만 지어졌다고 가정했으나, 지금의 사랑채 자리에 창고 등의 다른 건물군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구나 종가가 소유한 전답의 규모상 가옥 내에 창고가 없었을 리는 없으며, 실제로 1805년에 김도철이 올린 소지에서 땅문권을 창고에 보관했다는 언급을 통해 19세기 초 당시에도 가옥 내에 창고가 있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1841년 명문의 봉상 목록에서 문 앞의 논(門前畓) 10마지기가 기재되어 있어 당시 종가에 대문이 있었을 가능성도 추정해볼 수 있으나 현재는 모두 남아있지 않다. 이처럼 가옥의 구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필요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으로, 과거의 가옥 구조를 확언하기는 어렵다.
김택준 가옥 추정평면도
김종렬(金宗烈, 1859년~1876년)의 양자 김규하가 가주였던 시기에는 종가의 대대적인 증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5칸 규모의 사랑채(행랑채)가 안채 동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안채 부엌이 서쪽과 남쪽으로 반 칸 정도 확장되었으며, 부엌 앞쪽으로 고방과 마구간이 새롭게 지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채와 부엌 앞 부속채의 지붕 가구 구조가 이어지지 않는 점과 부엌 내부 기둥에 벽체를 설치했던 홈이 남아있는 것이 그 근거이다. 특히 안채 부엌의 지붕 구조가 팔작지붕인 점과 부엌 내부 기둥에 벽체를 설치했던 흔적은 이 기둥들이 건물의 외벽 기둥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앞서 살펴본 사우방과 달리 부엌 앞쪽으로는 추가적인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2025년의 수리 보고서에서 안채와 사우방의 연목(서까래) 지름이 150mm인 반면, 사랑채와 부엌 앞 부속채의 연목은 지름이 120mm로 동일한 것이 확인된다. 이처럼 부속채의 목부재 치목과 규격이 안채가 아닌 사랑채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통해 부속채와 사랑채가 함께 증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사랑채 망와에 새겨진 을묘년(1915년)을 통해서는 증축이 1915년경에 이루어졌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증축으로 기존의 안채 7~9칸에 사랑채 약 6칸(퇴칸 포함), 부속채 2칸이 더해지면서 현재의 가옥이 15칸 안팎의 규모를 이루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9세기 초 기록의 12칸을 상회하는 규모로, 1846년 이래로 위축되었던 종가의 재정이 상당 부분 회복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1986년의 김택준 가옥 (보수 이전)
겨울의 김택준 가옥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한 가옥의 연혁과 추가적인 정보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입향조 김여경의 두리 정착 이래로 지금의 자리에서 종가의 지위를 유지해 온 지는 300년이 넘었으며, 현존하는 안채와 사랑채 역시 각각 145년과 110년이 넘도록 존속해왔다.
가주(家主)
내용
연대
출처
김여경(1대)
현남면 두리 일대의 숲을 개척하여 창거(剏居), 종가 건립 추정(규모는 미상)
1700년대 초
종가실록
김준태(2대)
김준태(?~?, 1790년에 노직 정헌대부 가자) 생전에 종가 확장 추정
18세기(추정)
추정(일성록, 파보 등)
김도철(5대)
무과 급제 당시의 기와집이 12칸으로 확인
1801년경
종가실록
김도철(5대)
1804년(순조 4), 대형 산불로 종가 전소 추정
1804년
종가실록(소지 등)
김도철(5대) 또는 김주형(6대)
1804년 화재 이후 12칸 규모로 종가 중건 추정
1804년 ~1840년 사이
종가실록(명문 등)
김주형(6대)
김주형의 상선 사업 실패로 12칸 기와집과 집터를 강릉 이진사댁에 전당 잡힘
1840년
종가실록(명문 등)
김의성(7대)
채무 상환으로 집터와 12칸 기와집을 돌려 받음(還退)
1846년
종가실록(명문 등)
김동영(8대)
가옥이 퇴락하여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전의 제도 그대로 가옥 재건
1880년
성조택일기(파보)
김규하(10대)
사랑채와 안채 앞 부속채(고방·마구간) 증축 추정
1915년경
추정(망와, 연목 실측치 등)
가옥 구조 構造
소재지
양양군 현남면 두리
가옥 연혁
18세기 초 초건, 1804년 이후 중건 1880년 재건, 1915년경 증축 추정
구조
'H'자형의 겹집 구조
두리 마을에는 구릉지를 따라 동족의 여러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양양 김택준 가옥은 마을의 높은 곳에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대나무숲을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가옥은
'H'자형의 겹집으로, 'ㅏ'자형의 안채 우측으로 'ㅣ'자형의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안채는 4벌대의 자연석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영동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겹집의 형태이다. 안채의 전열에는
안주인이 거처하는 안방과 집안 어른이 거처하는 상방 등의 방이 있으며, 안채의 후열에는 며느리가 거처하는 뒷방과 도장방 등의 방이 있다.
안방의 좌측으로는 넓은 부엌이 자리하고 있는데, 뒤뜰 및 옆마당으로 넘어갈 수 있는 판문과 사우방과 안채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가 있다. 부엌 앞으로는 고방과 마구간이 있고 부엌 뒤쪽으로는
사우방(祠宇房)이 있다. 사우방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온돌방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단이 설치되어 있다. 고방은 여러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로 현재는 욕실로 사용하고 있다. 판벽으로 둘러싼
마구간(외양간)은 말을 키우던 곳으로 마구간 위로 물건을 보관하는 다락이 있는 형태이다. 11대손인 김철호(金喆鎬, 1906년~1956년)는 말을 탄 채로 사냥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때 잡은 것으로 전하는 호랑이 가죽이 손자 대의 유년기인 1970년대까지도 방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마구간에서는 그 무렵까지 말 2마리를 키웠다고 전하며, 현재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김택준 가옥 안채 전면
김택준 가옥 안채(사우방 및 부엌) 우측면
김택준 가옥 평면도
사랑채는 안채보다 후대에 지어졌는데, 자연석 세벌대 기단 위에 지어진 겹도리 팔작지붕 건물로, 팔작지붕인 전면과 달리 후면은 맞배지붕이다. 사랑채의 전면에는 2칸 규모의 사랑방이 있으며, 사랑방의
전면과 측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방 뒤로는 일을 도와주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행랑방이 있으며, 사랑방과 행랑방 모두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행랑방 뒤로는 곡식과 여러 물건들을 보관하던 곳간
2칸이 있다. 과거에는 안채와 사랑채의 연결 부분에 온돌 흙바닥을 깔고 천장을 고미반자로 하여 상 중에 거처하는 지청이 있었으나 현재는 뒤뜰로 이동하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가옥에는 3개의 굴뚝이 있는데, 첫번째로 사우방을 데핀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이 사우방 북쪽에 있다. 사우방 북측 자연석과 기와 와편으로 쌓은 담장 사이로 굴뚝을 조성해 놓았으며, 담장 하부로는
옆마당으로 빠져나가는 배수로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를 데핀 연기가 빠져나가는 굴뚝은 각각 뒤뜰과 행랑방 우측에 높게 조성되어 있다. 사랑채의 아궁이는 사랑방 좌측의 반침(책장) 하부 기단에 있다.
이 가옥에는 또 4개의 길이 있는데, 동쪽과 동남쪽의 길은 각각 작은댁과 아릇댁으로 향하는 길이다. 가옥 서남쪽의 길은 본래 집안의 여성들이 사용하던 길로 현재는 본 출입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가옥
정남쪽의 길은 본래 집안의 남성들이 사용하던 길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김택준 가옥 뒤뜰 전경
사우방 북측의 굴뚝
가옥의 뒤뜰은 본래 부엌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으며, 사우방과 뒷방, 도장방, 지청 역시 창호가 뒤뜰을 향하고 있어 뒤뜰로 접근할 수 있다. 뒤뜰에는 장독대와 0.5평의 냉장굴이 있으며, 곳간
2칸이 뒤뜰 방향으로 향해 있어 뒤뜰을 통해 곳간으로 접근할 수 있다. 뒤뜰 북쪽으로는 자연석으로 쌓은 단이 있으며, 지금은 거의 베어내었지만 그 위쪽으로 왕대나무 밭과 대나무 밭이 있다. 왕대나무는 여러 용도로 쓰임이 많아, 과거 외부인들이 종가를 찾아와 벌채를 청하면 이를 허락해주는 것이 종가의 위상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대나무
밭은 가옥의 서편에서 시작해 가옥 동북쪽 작은댁의 뒷마당까지 이어지는데, 가옥 동북쪽에 작은댁의 기와집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거주하지 않는다. 작은댁은 'ㄱ'자 기와집으로, 이 일대에서 흔히 보이는 겹집의 안채 동쪽 전면으로 부속채가 있는 형태이며, 안채 서쪽 전면에는 1칸 크기의 대문채도 있었다.
가옥 좌측 담장과 대나무숲
안채 부엌에서 본 뒤뜰의 모습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은 시간의 흐름과 용도의 변화에 따라 여러번 바뀌었는데, 특히 안채의 공간 구성이 그러했다. 현재 가문의 12대 종부(宗婦)이자, 종가를 관리하고 계신 할머니가 처음 시집 오셨던
20세기 중반의 공간 구성은 아래와 같았다.
김택준 가옥 평면도 (20세기 중반)
당시 안채의 전열에 안방과 상방, 일꾼방이 있었으며, 후열에는 뒷방과 며느리방/도장방 등이 있었다. 먼저 부엌 우측에 위치한 안방과 뒷방(며느리방)은 각각 안주인과 며느리가 거처하던 곳이다. 할머니가 처음 시집 오셨을 당시에는 안방에 마루가 깔려있었다고 하며, 상방과 안방 사이에는 나무 널빤지 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안방은 온돌로 개조된 듯 하며, 그 과정에서 널빤지 문도 현재의 미닫이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안방의
서쪽과 남쪽에는 각각 부엌과 마당으로 향하는 외살문이 있었으며, 뒷방과 안방 사이에는 4짝의 미닫이문이 있어 문을 떼어내어 2개의 방을 1개 방처럼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뒷방은
며느리가 거처하는 방으로, 서쪽과 북쪽에 각각 부엌과 뒤뜰로 향하는 외살문이 있었다.
상방은 집안의 제일 어른이 거처했던 방으로, 동쪽과 서쪽, 남쪽에 각각 일꾼방, 안방, 마당으로 향하는 문이 있었으며 북쪽 며느리방 방향으로 반침을 내어 책장 겸 이부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편,
과거에는 상방을 벽으로 나누어 상방 동쪽으로 일꾼방을 두었는데, 현재는 벽을 제거한 상태이다. 일꾼방 동쪽으로는 반침을 두어 이부장으로 활용했으며 동쪽과 남쪽에 각각 지청과 마당으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상방 북쪽으로는 2칸 규모의 며느리방(혹은 도장방)이 있었는데, 며느리방 역시 가운데에 벽과 문을 두어 2개의 방으로 사용되었으며 북쪽에 뒤뜰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위와 같이 전통적인 공간 구성과 차이를 보이는 안채의 공간 구성은 근대기에 변화한 생활 양식을 수용하면서 변화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
이야기 01
사랑채의 청기와(靑瓦)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사랑채 지붕에 청기와 2장이 얹혀져 있었다고 한다. 어떤 연유에서 사가(私家)의 사랑채에 청기와가 얹혀 있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이 청기와는 옛날부터 사랑채 위에
얹혀져 있었다고 한다. 해당 청기와는 1996년의 사랑채 보수 과정에서 일반 평기와로 교체되었는데, 뒤늦게 해당 사실을 안 종가측에서 양양군에 말해보았지만, 이미 누군가 사버려서 되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사랑채 합각부의 기와 2장이 그것으로 추정되나 사진의 해상도가 낮아 확실치는 않다.
1987년 말의 사랑채 (보수 이전)
이야기 02
6.25전쟁과 김택준 가옥
광복 이후 종가가 위치한 두리 일대는 38선의 바로 밑에 위치해 있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종가는 수레에 짐을 싣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피난을 가기 전에 종가의 물건이나 식량을 행랑채 뒤 곳간에 숨겨두었다. 이때 곳간의 마루를 뜯고 그 아래에 땅을 파서 이를 묻어 두었으며, 마루를 다시 덮고 곳간의 문까지 걸어 잠근 후에 두리를 떠났다.
종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고향의 땅을 밟을 수 있었으며, 두리 마을이 산 속 깊이 있던 점 때문인지 가옥에 큰 피해는 없었다. 다만, 피난을 떠나기 전에 물건과 식량을 숨겨두었던 곳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으며, 마루는 모두 뜯겨 그 아래에 있던 식량도 없어진 후였다고 한다. 종가에서는 이를 전쟁의 혼란 속에서 배고픔에 지쳤던 누군가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야기 03
종가 소장 문서
현재 종가에서 소장 중인 고문서들은 매우 제한적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어 현재는 매우 적은 수량만이 전하고 있다. 첫 피해는 위에서도 언급된 1804년의 대화재이다. 이때 종가에서 소장 중이던 거의 모든 문권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증거로 종가 소장 문서 중 1804년 이전의 문서는 현전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1980년대의 화재이다. 당시, 종가에서 소장 중이던 문서 중 대다수는 사랑채 우측에 반침을 내어 만든 책장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반침 아래로는 사랑채를 데우는 온돌의 아궁이가 있었다. 그러던 1985년경 책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반침 바닥이 무너지면서 많은 책들이 아궁이 속 불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물로 불을 끄고 아궁이 속에서 불타던 책들을 급히 꺼내었지만, 이미 불타버린 책들까지 구할 수는 없었다. 현재 소장 중인 문서 대다수에 남은 그을림과 곰팡이를 통해 당시의 긴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은 1990년대의 보수 공사이다. 현재의 종가는 1993년과 1996년, 두 번에 걸쳐 보수하였는데,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고문서 중 적지 않은 수를 상자에 담아 사우방 구석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보수 공사 이후 사우방에 보관하던 물건들 중 해당 상자만이 없어진 걸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문화재 보수 공사를 담당했던 인원 중 누군가가 가져간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전말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종가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벌어진 일에 대해 담당 부서에 항의하였지만, 끝내 그 문서들은 찾지 못하였다.
위 세 번의 사건 중 뒤의 두 건은 온전히 종가의 안일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중 가장 안타까운 점은 당시에 소장 문서에 대한 파악이나 목록화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어떤 문서가 있었고 어떤 문서가 소실되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후로도 이러한 상황은 유지되었다. 최근까지도 종가에 어떤 기록과 문권이 있는지 모르는 채로 책들은 행랑에 방치되어 있었다. 어떤 기록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을 보존하고 다음 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가의 일원이자 한국사를 전공한 학생으로서, 적게나마 남아있는 소장 문서들을 조사해 목록화 및 디지털화하고 있으며 이 기록들이 다른 이들에게 공유될 수 있도록 이 사이트를 제작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야기 04
가옥과 망와(望瓦)
김택준 가옥의 안채와 사랑채의 지붕마루에는 본래 다양한 망와(望瓦)가 있었다고 한다. 도깨비 문양부터 불꽃 문양의 망와 등 다양한 형태의 망와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해당 망와들은 대부분 문화재
보수 과정에서 현대식 망와로 교체되었다. 아마 망와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사랑채 후면부 맞배지붕의 양쪽 내림마루에 유일하게 구식의 망와 2점이 남아있다.
사랑채 후면부 내림마루의 망와
사랑채 망와 문양 실측도
위 망와의 문양은 벼나 조 등의 이삭으로 추정되는 식물을 중심으로 양 옆에 나비가 있는 쌍접문(雙蝶文)으로 추정되며, 식물의 네 잎 아래로 망와가 제작된 연도(을묘년, 1855년 혹은 1915년)와 날짜(3월 6일)가 양각되어 있다. 다만, 해당 망와는 기존 가옥에 있던 망와들 중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생각되는데, 망와의 제작연대 표기가 좌횡서(左橫書)로 되어 있어 1915년에 제작된 망와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사랑채가 1915년에 지어졌거나, 1915년에 한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종가 로고도 해당 망와의 문양과 『종가실록』에서 집자(集字)한 글자를 바탕으로 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