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김택준 가옥은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현남면 두리(斗里)에 위치한 경주김씨 상촌공파 두리종중의 종택으로, 마을 내에선 주로 큰집(大宅)이라고 불렸다. 종택은 조선 후기 18세기 초 입향조인 김여경(金如瓊, 1682년?~?)에 의해 처음 지어졌는데, 김여경은 양양읍에 거주하던 상촌공파의 후손으로, 이 시기에 현남면으로 내려와 두리 일대의 숲을 개척하여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김여경의 5대손인 김도철(金道喆, 1769년~1812년) 대에 이르러서는 기와집이 12칸이었으며, 논이 482마지기, 밭이 202마지기에 노비는 7명이었다고 『종가실록(宗家實錄)』에서 기록하고 있다.
멀리서 본 김택준 가옥 전경
이후 1804년(순조 4) 3월 강원도 영동지역에 발생한 대형 산불이 두리 일대까지 번지면서, 가옥이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의 산불은 왕에게 보고될 정도의 큰 불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에 따르면 산불이 강원도 삼척에서 통천까지 200여km를 이동하며 민가 2천 6백여 호와 사찰 6곳을 불태우고 61명이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 이 사건으로 가옥은 물론, 종가에 소장하던 문권(文券)과 입향조인 김여경 및 장남 김한태(金漢泰)의 가자(加資, 관직과 품계를 올려주는 증서), 김여경의 현손(玄孫)인 김도철의 홍패(御賜紅牌)까지 모두 불타게 된다. 선전관을 지낸 김도철이 가주(家主)일 때의 일이다. 해당 사실은 화재 직후 김도철이 양양부 관아에 올린 소지를 9대손인 김규하(金圭夏)가 『종가실록』에 필사해두어 오늘날까지 전한다.
김도철의 장남 김주형(金胄衡)이 가주였던 1841년의 『종가실록』 기록에는 김주형이 상선(商船) 사업의 실패로 발생한 막대한 채무 때문에 12칸 기와집(瓦家十二間)과 그 집터를 강릉의 이진사댁에 봉상(捧上)한다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화재 이후 1840년경 이전에 이미 가옥을 12칸 규모로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주형의 차남 김의성(金義聲)의 노력으로 해당 빚을 모두 갚은 것이 1846년이었으며, 그로부터 34년 뒤인 1880년의 기록이 고종 연간에 제작된 『경주김씨파보(慶州金氏派譜)』의 표지 뒷면에서 발견되었다.
해당 기록은 성조택일기(成造擇日記)로, 가옥을 새로 지을 때 안공(安工, 착공)부터 입택(入宅, 입주)까지의 모든 공정의 길일·길시·방위 등을 지관이 산정해 적어둔 문서이다. 표지 뒷면의 위아래로 두 안의 택일기가 적혀 있으며, 아래의 제2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택일기에 따르면, 1880년의 가옥 신축은 기존에 있던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집을 짓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이때의 가주는 김의성의 장남이자 김지성(金志聲)의 양자인 김동영(金東永, 1838년~1902년)이었다.
위 택일기를 바탕으로 가옥의 연대를 계산해보면 1880년에 다시 지은 현재의 안채 건물이 대략 150여년 정도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중건된 안채의 규모는 보는 시각에 따라 6칸 ~ 11칸 사이로 추정할 수 있는데, 부엌 앞뒤의 부속채(고방, 마구간)와 사우방을 제외한 'ㅡ'자 형태의 팔작지붕 와가로 지어졌다고 가정하면 6~8칸으로 그 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의 안채 구조에서 부엌 앞의 부속채를 제외한 'ㄴ'자 형태의 7칸~9칸 규모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광무 3년(1899년) ~ 광무 10년(1906년)의 호적표(戶籍表)에는 종가에 대해 '기와집 6칸(瓦 六間)'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전체 칸 수를 기재한 것인지 살림공간만을 기재한 것인지 그 기재 기준을 알 수 없어 이를 통해 당시 가옥의 정확한 칸 수를 추정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또한, 종가에서 소장중인 광무 호적 15본 중 1본(김희열, 초가 2칸)을 제외한 14본(종가, 작은댁, 웜집, 베메집)에서 가옥의 칸 수를 '와가 6칸' 또는 '초가 6칸'으로 기재하고 있어 당시 '6칸'이 형식적인 기재였는지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여기서 확실한 점은 1880년의 가옥 재건은 기존 12칸 규모에서 다소 축소된 규모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1846년의 채무 상환 이후 종가의 재정규모가 축소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김재열의 장남(金載烈) 김규하가 가주일 때는 종가의 대대적인 증축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에 5칸 규모의 사랑채(행랑채)가 안채 동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안채 부엌이 서쪽으로 반 칸 정도 확장되었으며, 부엌 앞쪽으로 고방과 마구간이 새롭게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와 부엌 앞 부속채의 지붕 가구 구조가 이어지지 않는점, 부엌 서쪽 기둥에 벽체를 설치했던 흔적, 부엌 앞 부속채의 기둥 치목이 사랑채와 유사하다는 점이 그 근거라 생각된다. 사랑채의 망와를 통해 이 증축이 1915년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증축으로 기존 7~9칸 규모에서 현재의 13~15칸 규모로 가옥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