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종중

두리종중 소개

경주김씨 두리종중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두리 일대에 정착한 경주김씨 후손들로, 이 곳에 처음 정착한 태사공의 20세손 김여경(金如慶)의 후손이 14대에 걸쳐 두리 일대에 거주해 왔다.

두리종중의 계보

두리종중은 오랜 옛날부터 태사공의 9세손인 상촌공의 후손으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김여경 윗대의 계보가 실전되어 그 선조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실정인데, 1804년(순조 4) 영동지방에 발생한 대형 산불로 종가를 비롯해 종가 소장 문서가 모두 불타 버린 것이 그 원인으로 추정된다. 현재 종가에는 1894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김씨파보(慶州金氏派譜)』와 20세기 중엽에 제작된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 두 책이 전하는데, 김여경 윗대의 계보가 두 책에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파보에서는 '宙' 장에 김여경의 부친으로 영환(榮煥) 두 자만 기재되어 있을 뿐 그 이상의 정보는 전하지 않는다. 그 이전 장인 '宇' 장에는 태사공의 17세손 김홍욱(金弘郁)과 김홍필(金弘弼) 등 그 형제들이 기재되어 있으며, 그 밑으로 김홍욱의 장남 김세진(金世珍)과 김세진의 자녀가 4남 김두벽(金斗壁)까지만 기재되어 있다. '宇' 장의 인물 배치는 다른 족보의 것을 그대로 모사한 듯 다소 이상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김홍필의 자식, 김홍욱의 차남 및 딸들과 같이 기재할 필요가 없는 인물들은 기재를 생략하였다. 어떤 목적에서 이와 같이 인물을 배치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파보 宇 장 파보 宙 장

『경주김씨파보』의 宇 장과 宙 장

세보에서는 반대로 김여경 윗대의 계보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세보에서는 김여경의 부친인 김영환을 판관공 김영년(金永年)의 손자 김맹견(金孟堅)의 3남 김홍(金泓)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보에는 김홍의 3남 김원성(金原誠)의 장남으로 김용(金鏞), 자(字)는 취중(就中)으로 기재해 놓았으며, 그 밑으로 장남 김여안(金汝顔, 자 일복(一復)), 차남 김여증(金汝曾, 자 일관(一貫)), 삼남 김여맹(金汝孟, 자 일규(一揆))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삼남 김여맹의 자식으로 장남 김식(金栻), 차남 김계(金棨), 삼남 김비(金棐), 사남 김역(金櫟), 5남 김야(金椰)가 기재되어 있으며, 삼남 김비의 아들로 김영환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가계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이때 김비의 경우, 묘에 대한 정보(在襄陽洛山寺林內暗葬云)와 아내(순화최씨)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으며, 김영환은 생몰연대(1650~1709년)와 관직(현종조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묘의 위치(양양읍 차마리 간좌), 아내(강릉최씨)에 대한 정보가 매우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 언뜻 사실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이를 1784년에 간행된 경주김씨 상촌공파의 갑진보(甲辰譜)와 비교해 보면 위 계보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계보 검증

우선, 김홍의 삼남 김원성은 서자이다. 또한, 위 세보에서 자로 기재된 '취중'과 '일복'이 갑진보에서는 김원성의 아들과 손자인 김용과 김여안의 실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서자 계보의 특성상 정보가 누락되어 이름 대신 자로 기재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갑진보에서 김취중의 자식은 오직 김일복 1명으로, 차남과 삼남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으며 이는 후대의 다른 족보에서도 똑같다. 물론, 서자의 계보상 정보가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 오히려 서자 계보의 빈자리에 자기 조상이나 없는 인물을 만들어내어 붙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의심에 힘을 실어주는 사실이 또 있는데, 세보에서 김영년의 먼 후손으로 기재된 김영환이 그것이다. 세보의 계보와 달리 20세기에 간행된 상촌공파세보에서 김영환은 김영년의 동생인 김영원(金永源)의 후손으로 기재되어 있다. 상촌공파세보에 따르면, 김영원의 차남 김이(金儞)의 손자가 김직(金直)이며, 김직 아래로 김직-김덕은(金德垠)-김필숭(金弼崇)-김언빈(金彦賓)의 계보가 이어진다. 이때, 김언빈의 차남 김윤백(金允白)의 3남이 김영환이다. 김영환 밑으로 '如'자 돌림의 아들 6명이 있는데, 이 중 김여경의 이름은 없다. 심지어 상촌공파세보에 기재된 김영환의 생몰연대와 아내, 묘에 대한 정보까지 세보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즉, 세보에 기재된 김여경 상계(上系)의 계보는 조작된 계보임을 알 수 있다. 파보에는 없던 정보가 세보에서 상세히 기재되어 있는 점은 후대에 외부 자료를 참고하여 빈자리를 채운 결과로 추정된다.

이를 정리하면, 파보에서는 김영환의 이름만이 전할뿐, 그 윗대의 기록은 전부 실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20세기 중엽에 제작된 세보에서는 김영환의 정보와 그 상계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지만, 교차검증되지 않는 정보이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러한 사실들이 성씨까지 갈아치우는 모칭(冒稱) 등의 사례는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1801년(순조 1)의 『숭정3신유하이정종대왕제향세실경과정시문무전시방목(崇禎三辛酉夏以正宗大王祭享世室慶科庭試文武殿試榜目)』과 1800년(정조 24)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기록에서 김경희(金慶喜, 자 도철(道喆))에 대해 양양에 거주하는 경주 김씨라는 사실이 교차 검증되며, 순조연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울진장씨대동보의 기록에서도 김여경~김상연으로 이어지는 4대의 이름과 함께 경주김씨의 본관도 같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김여경-김한태(金漢泰) 때부터 일찍이 밀양박씨, 가산이씨, 울진장씨 등 양양 및 영동 지방에 세거하는 가문들과 혼맥을 맺은바, 선대에 이미 지위가 어느정도 확립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검토한 내용들을 종합해보자면, 1804년의 화재 등의 이유로 이미 종중에서는 김여경 상계의 정보가 실전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1894년경에 제작된 파보에서도 김여경의 위로 김영환의 이름만 기재할 뿐 윗대의 계보는 명시하지 않았다. 세보의 조작된 계보는 족보의 편찬과 확장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20세기 중엽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대동보 등의 족보 편찬이 이루어지자 실전된 계보의 빈자리를 갑진보 등의 자료에서 실제 인명을 가져와 가장 그럴듯한 연결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제로 양반가임에도 상계의 일부가 실전되어 윗대의 정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였고, 이런 경우에는 족보에 실전된 계보를 기재하지 않거나 별보로 등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족보상에서 기록이 누락되는 경우도 많았는데, 실제로 갑진보에서 김영환의 6대조인 김직이 김양필의 서자로 기재되어 있고 그 아래로 계보가 없으며, 1871년 신미보에서는 김직의 이름 자체가 안 적혀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김여경이 김영환의 서자이거나 아들임에도 기록이 누락되어 기재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울진장씨대동보에 기재된 김여경의 한자명은 '金如瓊'인데, 위의 상촌공파세보에 기재된 김영환의 아들 6명의 항렬자를 제외한 한자의 부수가 모두 '王'으로 동일하다. 현재로써는 윗대의 계보를 증명할만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모두 추정의 영역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