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 뒷골(후동, 後洞)의 마을은 조선후기 이 지역에 처음 정착한 김여경(金如瓊)의 후손들이 300여년 동안 대대로 세거해 온 집성촌으로, 위 항공사진에서 보다시피 1950년대까지도 이 마을에는 20채가 넘는 가옥들이 들어서 있었다. 위 「두산정기」의 언급도 골짜기 안에 가옥들이 빽빽이 들어선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현대에 들어 전통사회가 해체되며 현재 뒷골에는 경주김씨의 가옥은 큰집을 포함해 5채만이 전하고 있다.
경주김씨 상촌공파 두리종중의 세거지, 두리마을을 둘러봅니다.
두리 뒷골(후동, 後洞)의 마을은 조선후기 이 지역에 처음 정착한 김여경(金如瓊)의 후손들이 300여년 동안 대대로 세거해 온 집성촌으로, 위 항공사진에서 보다시피 1950년대까지도 이 마을에는 20채가 넘는 가옥들이 들어서 있었다. 위 「두산정기」의 언급도 골짜기 안에 가옥들이 빽빽이 들어선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현대에 들어 전통사회가 해체되며 현재 뒷골에는 경주김씨의 가옥은 큰집을 포함해 5채만이 전하고 있다.
현남면(縣南面) 두리(斗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명칭이 변화해 왔는데, 그 명칭의 변화를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종가 소장 문서 중 두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도광 8년(1828)에 제작된 김주형준호구로, 해당 준호구에서 두리는 '현남면 원당리(元堂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후 1894년 기록까지 원당리로 유지되는 것을 통해 19세기에 두리 일대가 원당리로 구획되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1846년 소지의 '후동(後洞)'은 행정구역이 아닌 종가가 위치한 '뒷골' 자체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897년(건양 2)의 호적표에서 두리의 행정구역명이 '현남면 후동리(後洞里)'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896년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 체제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행정구역의 개편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한편, 1903년(광무 7)의 대한제국 전답관계에서 창리(昌里) 성황동(城隍洞) 일대의 밭이 원당(元堂) 원(員)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두리 일대의 전답이 후곡(後谷, 뒷골) 원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 이를 통해 '원당(元堂)'이라는 지명이 두리가 아닌, 두리 뒷골에 접해 있는 창리 성황동에 귀속된 지명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만약 이 논리대로라면, 조선 후기에 두리와 창리(또는 창리 성황동 일대)가 원당리라는 이름 아래에 함께 구획되어 있다가 1896년의 행정개편으로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분리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 연도 | 기재사항 | 출처 | 기타 |
|---|---|---|---|
| 1828년(순조 28) | 현남면 원당리(元堂里) | 김주형준호구(도광 8년) | 준호구, 제5호 |
| 1831년(순조 31) | 〃 | 김주형준호구(도광 11년) | 준호구, 제4호 |
| 1834년(순조 34) | 〃 | 김주형준호구(도광 14년) | 준호구, 제O호(공란) |
| 1843년(헌종 9) | 〃 | 김주형준호구(도광 23년) | 준호구, 제4호 |
| 1846년(헌종 12) | 현남면 후동(後洞) | 종가실록(1930) | 양양부에 올린 소지 (종가실록 수록), 행정구역명이 아닌 지명으로 추정 |
| 1849년(헌종 15) | 현남면 원당리(元堂里) | 김주형준호구(도광 29년) | 준호구, 제2호 |
| 1855년(철종 6) | 〃 | 김주형준호구(함풍 5년) | 준호구, 호구단자, 제3호 |
| 1858년(철종 9) | 〃 | 김주형준호구(함풍 8년) | 준호구, 제2호 |
| 1861년(철종 12) | 〃 | 김주형준호구(함풍 11년) | 준호구, 제3호 |
| 1870년(고종 7) | 〃 | 김탁영준호구(동치 9년) | 김동영, 준호구, 제5호 |
| 1873년(고종 10) | 〃 | 김탁영준호구(동치 12년) | 김동영, 준호구, 제2호 |
| 1876년(고종 13) | 〃 | 김국성준호구(광서 2년) | 준호구, 제2호 |
| 1879년(고종 16) | 〃 | 김탁영준호구(광서 5년) | 김동영, 준호구, 제5호 |
| 1882년(고종 19) | 〃 | 김치성준호구(광서 8년) | 준호구, 제5호 |
| 〃 | 〃 | 김탁영준호구(광서 8년) | 김동영, 준호구, 제2호 |
| 1885년(고종 22) | 〃 | 김탁영준호구(광서 11년) | 김동영, 준호구, 제1호 |
| 1888년(고종 25) | 〃 | 김탁영준호구(광서 14년) | 김동영, 준호구, 제5호 |
| 1894년(고종 31) | 〃 | 김탁영준호구(광서 20년) | 김동영, 준호구, 제1호 |
| 1897년(건양 2) | 현남면 후동리(後洞里) | 건양호적(김동규) | 제4통 2호 |
| 1899년(광무 3) | 〃 | 광무호적(김동영) | 제1통 6호 |
| 〃 | 〃 | 광무호적(김탁영) | 김동영, 제1통 2호 |
| 〃 | 〃 | 광무호적(김동규) | 제1통 5호 |
| 〃 | 〃 | 광무호적(김동호) | 제1통 7호 |
| 〃 | 〃 | 광무호적(김용원) | 김봉렬, 제1통 6호 |
| 〃 | 〃 | 광무호적(김왈책) | 김희열, 제1통 4호 |
| 1901년(광무 5) | 〃 | 광무호적(김동영) | 제1통 4호 |
| 〃 | 〃 | 광무호적(김동규) | 제1통 3호 |
| 1902년(광무 6) | 〃 | 광무호적(김동영) | 제1통 8호 |
| 1903년(광무 7) | 〃 | 〃 | |
| 〃 | 〃 | 광무호적(김동규) | |
| 〃 | 〃 | 광무호적(김봉렬) | |
| 〃 | 현남면 후곡원(後谷貟) | 대한제국 전답관계(김경심) | 김재열, 동진(東津) 뒷기슭(後麓) 밭 |
| 〃 | 〃 | 대한제국 전답관계(김재열) | 문 앞(門前) 삼소댁 터(三小宅基) 밭 |
| 〃 | 〃 | 대한제국 전답관계(김문중) | 문중 소유 논, 소후동(小後洞) 논 |
| 〃 | 〃 | 대한제국 전답관계(김규하) | 소후동(小後洞) 음곡(陰谷) 밭 |
| 〃 | 〃 | 〃 | 장규(長圭) 밭 |
| 〃 | 〃 | 〃 | 터(基) 밭 (소댁 집터 앞(小宅基前)) |
| 〃 | 〃 | 〃 | 뒷골(後洞) 문 앞(門前) 논 |
| 〃 | 〃 | 〃 | 영남기(嶺南基) 밭 |
| 〃 | 현남면 원당원(元堂貟) | 대한제국 전답관계(김문중) | 문중 소유 밭, 성황동(城隍洞) 밭 |
| 〃 | 현남면 두동(斗洞) | 대한제국 가옥관계(김규하) | 제1통 제5호, 와가(瓦) 6칸, 행정구역명이 아닌 지명으로 추정 |
| 1906년(광무 10) | 현남면 후동리(後洞里) | 광무호적(김규하) | |
| 〃 | 〃 | 광무호적(김동규) | |
| 1910년(명치 43) | 현남면 두동(斗洞) | 민유산림약도(1910) | 불당재산 약도(종가실록 수록) |
| 〃 | 〃 | 〃 | 두동 앞기슭 불당재산(원본), 두동 2통 5호 김규하 |
| 1911년(명치 44) | 〃 | 농상공부 식산국 접수증 | 청룡등 접수증(종가실록 수록) |
| 1930년(소화 5) | 현남면 두리(斗里) | 두산정기(1930) | 최대수 기 |
| 〃 | 〃 | 종가실록(1930) | 김규하 기 |
| 1956년 | 〃 | 부위록(1956) | 김철호 |
위 두리동학 지도는 1930년에 저술된 『종가실록』의 「두리동학전체도」 및 1916년 현남면 지적원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지세명기장(地稅名寄帳)』 등에 기반하여 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도상의 필지와 인명은 위 자료의 내용을 따랐습니다. 다만, 100여년의 시간동안 이루어진 전통사회의 해체, 토지매매 등으로 현재의 가옥 소유 및 필지 소유 관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도에는 각 지파 소유의 산비탈과 집터, 논답 등을 표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