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형세가 좁고 우묵해서, 한 골짜기에 함께 사는 종족이 수십 호에 불과한데도 담장과 지붕이 서로 이어져 거의 다 수용하지 못할 지경이다. 이 땅이 '두(斗)'로 이름을 얻은 것이 혹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地勢狹凹,宗族之同居一谷者,不過數十戶,墻屋相連,殆不能容。地之以斗得名,豈以此歟。
— 수양(睡養) 최대수(崔大洙), 「두산정기(斗山亭記)」, 1930년
두리 뒷골(후동, 後洞)의 마을은 조선후기 이 지역에 처음 정착한 김여경(金如瓊)의 후손들이 300여년 동안 대대로 세거해 온 집성촌으로, 위 항공사진에서 보다시피 1950년대까지도 이 마을에는 20채가 넘는 가옥들이 들어서 있었다. 위 「두산정기」의 언급도 골짜기 안에 가옥들이 빽빽이 들어선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현대에 들어 전통사회가 해체되며 현재 뒷골에는 경주김씨의 가옥은 큰집을 포함해 5채만이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