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인물

두리종중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에 기반한 향반 가문으로, 과거 급제자 및 음관을 비롯해 지역 사족 사회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여럿 전한다. 이 중 종가실록·방목·호구단자·군지류 등 여러 자료와 교차검증되는 인물들을 위주로 아래에 기재하였다.

김윤백 상계(上系)


김양필(金良弼, 1467년?~1545년?)

조선 전기 중종대의 무신으로, 통훈대부 장흥부사를 지낸 김칭(金偁)의 장남이다. 생몰은 1999년에 간행된 기묘보의 것으로 검증이 필요하다. 김양필은 평안도의 강동현령(江東縣令, 종5품)을 거쳐 가선대부 북병사(北兵使,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는데, 그의 최종관직은 족보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경주김씨 갑진보(1784년)에 기재된 김양필의 최종관직은 가선대부(종2품) 북병사이며, 문화류씨 가정보(1565년)에 기재된 김양필의 관직은 첨지중추부사(僉知, 정3품)이다. 다만, 김양필로 인한 추은(推恩)으로 그의 부친 김칭과 조부 김영원(金永源)이 각각 참판(종2품)과 호조참의(정3품)를 증직받았으므로, 김양필의 최종관직은 가선대부 북병사로 판단된다.

1. 김양필과 삼척김씨 오산(梧山) 김양필(金良弼)
김양필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과 교차검증되는데, 동시기 중종대 삼포왜란(1510년)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지는 삼척김씨의 오산(梧山) 김양필(金良弼, 또는 金亮弼)과 혼동할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구분이 요구된다(이하에서 삼척김씨 김양필은 오산으로 칭함). 삼척김씨 을묘보(1795년)에 따르면 오산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경상도병마절제사(慶尙道兵馬節制使)와 통우후(統虞侯)를 지냈다고 기재되어 있다. 1904년에 간행된 갑진보에서는 '1510년(중종 5)에 을과(乙科) 제4인으로 급제하여 삼포왜란 당시에 충성을 떨쳐 적에게 달려가 수십 인을 쏘아 죽이고, 몸에 십여 곳의 창상을 입어 거의 죽을 뻔하다 다시 살아나 개선하였다(正德庚午歲中廟五年中乙科第四人當三浦倭亂奮忠赴賊射殺數十人身被十餘創幾死復甦凱還)'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어모장군 行 경상좌도진관병마동첨절제사와 통우후, 동래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일설에는(一云)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냈다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하자 주위에서 돌아오기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위 기록에서 검토해야 할 사안은 세 가지이다. 첫째, 오산은 삼포왜란(1510년)에서 활약하였는데, 정작 그가 녹훈받은 것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녹훈된 선무원종공신(1605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산의 관직으로 기재된 '통우후'이다. 통우후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처음 설치된 1593년 이후에 등장하는 조선 후기의 관직으로, 중종대에 활약했다고 전해지는 오산의 이력과는 시기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셋째, 오산의 장남 신당(新堂) 김훈(金勳)이 1613년(광해군 5)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동해 만경대(萬景臺)의 존재이다. 만약 오산이 1510년에 활약한 인물이라면 그 아들이 1613년에 정자를 창건할 당시 매우 고령이어야 하므로, 연대상 자연스럽지 않은 측면이 있다. 반면에, 오산을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한 인물로 본다면 그 연대가 훨씬 자연스러워진다.
결정적으로, 오산이 기재된 비교적 가장 이른 시기의 족보인 을묘보(1795년)에는 중종 5년의 무과 급제 사실이나 삼포왜란에 대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을묘보 편찬 당시에 오산을 임진왜란 시기의 공신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삼포왜란 관련 서술은 현재 확인한 자료 중 을묘보(1795년)에는 보이지 않고 갑진보(1904년)에서 확인되는 만큼 오산의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삼척김씨 측의 추가적인 검토가 요구되며, 이하에서는 중종대 실록에 등장하는 김양필의 행적을 경주김씨 김양필의 것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 김양필 처 남씨(南氏)
한편,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경주김씨의 김양필과 삼척김씨의 오산 김양필 모두 아내를 영양남씨/의령남씨 남유재(南有梓)의 딸로 기재하고 있는 점이다. 경주김씨 갑진보(1784년)와 삼척김씨 을묘보(1795년)의 기재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족보기재사항
경주김씨 갑진보 김양필 처 정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 父 유재(有梓), 外祖 남양(南陽) 홍맹부(洪孟阜)
삼척김씨 을묘보 김양필 처 영양남씨(英陽南氏), 父 장군 유재(有梓), 祖 생원장원 과(薖), 曾祖 한림 득공(得恭), 外祖 직장 홍맹부(洪孟阜)

기재사항은 삼척김씨의 것이 더 풍부하지만, 경주김씨 김양필은 자식이 서자인 김직(金直)뿐으로 그 후손이 족보 편찬망에서 소외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자연스러운 결과로 볼 수 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김양필과 그 부친 김칭의 정보가 일부분만 전하는 것도 이 때문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검토한 결과에 따라 오산이 임진왜란 시기의 인물로 가정한다면 그 생년은 1550~156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반면, 김양필은 비록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그 생몰이 1467년~1545년으로 비교적 자세히 전해진다. 김양필의 아내 남씨의 계보에서 생몰연대가 알려진 인물은 다음과 같다.

증조부 남득공(南得恭, 1424년경 졸) (조선왕조실록)
진외증조부 김원의(金元義)의 장남 김흥민(金興敏, 1374년생, 할머니 삼척 김씨의 형제) (삼척김씨 족보)
외증조부 홍여공(洪汝恭, 1377년~1440년) (남양홍씨 족보)
조부 남과(南薖)의 사위 최응현(崔應賢, 1428년~1507년, 남유재와 동세대)의 삼남 최세절(崔世節, 1479년~1535년, 김양필과 동세대) (영양남씨 가승, 1884년)

이를 바탕으로 김양필 처 남씨의 생년을 역산하면 대략 1460~1470년대가 된다. 따라서, 오산이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남유재의 딸과는 약 100년의 연대 차이가 발생한다. 이상의 검토를 종합하면, 남유재의 딸과 혼인한 김양필은 경주김씨 김양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1751년(영조 27)에 간행된 영양남씨 족보에서 김양필의 아들로 김훈(金勳)이 기재되어 남유재의 사위를 삼척김씨 오산으로 기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실제로 남유재의 사위가 오산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연대 계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두 번째는 18세기 당시에도 두 인물 간 혼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양필에게 적통 후손이 없었으며, 김양필의 서자 김직의 후손은 족보 편찬망에서 소외되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외손까지 모두 기재하는 문화류씨 가정보에 김양필의 자녀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점이 부인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음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김양필 처 남씨 문제와 관련해 문헌 간 교차검증에서는 남유재의 사위로 삼척김씨 오산을, 연대 계산에서는 남유재의 사위로 경주김씨 김양필을 가리키고 있어 현재로서는 어느 쪽도 확정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추가적인 연구나 검증이 필요하다.

3. 조선왕조실록 속 김양필
조선왕조실록에서 김양필은 교동 수직장(喬桐守直將)으로 처음 등장한다. 김양필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을 배행(陪行)한 장수 중 한 명으로, 연산군의 유언을 조정에 보고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때 교동 수직장 임무의 성격과 폐왕의 유언을 조정에 직접 보고했다는 기록, 중종 14년의 기사에서 당시 교동으로 배행한 장수 중에는 당상관이 있었다는 언급 등을 통해 이미 1506년 당시에 김양필이 상당히 높은 지위의 무신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1510년 4월 24일의 삼포왜란 기사에서는 유담년의 군관 내금위 김양필이 왜적의 머리를 자를 때 한 왜적에 칼로 등과 다리를 찔렸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후의 기록에서 김양필은 1달 간격으로 우후(虞侯)를 거쳐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된다. 이는 삼포왜란 당시의 전공으로 인한 특진의 성격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후 김양필은 함경도의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를 지내는데, 김양필은 무에 재능(武才)이 있으니 변방의 무(武)를 쓰는 곳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삼정승의 개차(改差) 요청에 따라 함경북도 북단의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임명된다. (이때 김양필이 세운 누정인 제승정(制勝亭)이 회령부 객관 동쪽에 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김양필은 그 무의 재능은 인정받았으나, 포악하고 잔인한 성격과 행실로 재임 기간 내내 대간의 개차와 체직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회령부사로 있을 때는 성질이 포악하고 수사(水使,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실수가 많았으며, 국상(國恤) 기간 중에도 창원(昌原)의 기녀와 살았다는 이유로 대간이 수차례 체직을 요구하였고, 함경도 최북단의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있을 때는 잔인하고 포악하여 거쳐간 곳마다 살상을 행하였다는 이유로 간원이 체직을 청하기도 했다. 또한, 김양필이 제주목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김양필이 부임을 지속해서 미루고 제주 목사직이 싫은 기색까지 표하자 대간이 수차례 추국과 체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김양필은 재임 기간 내내 대간의 탄핵과 체직 요구가 뒤따랐으나,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체직과 서용이 반복되면서도 무재를 인정받아 관직에 계속 기용되었다.

1519년(중종 14)에는 김양필을 다시금 서용하여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1521년(중종 16)에 추자도(楸子島) 해역에서 왜적에 의해 선박 7척이 격침되는 사태(추자도 왜변)가 발생하자 주장(主將)으로서 직책을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 추고되어 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김양필의 옥중 상소를 중종이 받아들여 1522년(중종 17)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서용되었다. 이후에도 김양필은 그의 성격과 행실로 끊임없이 추고와 체직 요구가 이어졌으나 조정에서는 그의 능력을 양장(良將)으로 높이 평가하여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使)와 타위(打圍, 임금이 친히 나가서 하는 사냥) 위장(衛將) 등을 계속 역임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1532년(중종 27),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양필이 품계 있는 음관, 즉 엄연한 관리를 형살(형벌로 죽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본래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은 체형(장형)을 가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이 사건으로 김양필은 장형을 받게 된다. 이는 평소 김양필을 비호했던 중종이 관례를 깨면서까지 직접 처벌한 것으로, 이 일로 사헌부에서 김양필을 영구히 서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1535년(중종 30), 김양필은 다시금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서용된다. 이는 중종이 사헌부의 결정과 대전(大典)의 법에 예외를 둔 것으로, 중종은 이에 대해 조정의 여론도 김양필이 무반 중 끝내 버릴 수 없는 자로 말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에 대간이 1주일 동안 6번에 걸쳐 김양필의 체직을 청하였으나, 중종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김양필은 삼정승의 청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이를 역임하였다. 이처럼 김양필은 재임 기간 내내 그 성격과 행실로 끊임없는 논박을 받은 인물이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중종의 비호 속에서 끝까지 고위 무관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는 성종대에 행실로 논박을 받으면서도 성종의 비호 속에서 고위직을 유지한 그의 부친 김칭의 사례와 유사하여 특기할 만하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김윤백 하계(下系)


김윤백(金允白, 1598~1679년)

조선후기의 공신으로, 심기원(沈器遠)의 난에 인조(仁祖)를 직접 업고 밤에 30여 리를 호종한 공으로 1646년(인조 24)에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 2등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계(陞階)되었다.
【참고문헌】 『강원도사』

다만, 심기원의 난은 사전에 발각되어 군사적 충돌 없이 진압된 사건으로 인조 역시 궐내에 있었기에 실제 호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강원도사의 위 내용은 후대에 덧붙은 이야기이거나 혼동한 것으로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한편, 규장각 소장 『영국원종공신녹권(寧國原從功臣錄券)』에서 김윤백은 영국원종공신 2등의 명단에 보인(保人)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윤백이 보인으로 기재된 이유는 그가 서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보인은 정군(正軍)을 경제적으로 보조하는 군역으로, 서얼금고법으로 관직 진출이 막힌 서얼 출신이 지는 경우도 있었다.
김윤백의 5대조가 되는 김직은 가선대부 김양필의 서자로,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그 후손 대대로 관직 진출의 길이 막혔을 것이다. 그러던 중 김직의 5대손 김윤백이 영국원종공신에 책봉되며 서얼 차별에서 벗어나는 허통(許通)의 혜택을 받았으며, 이와 동시에 통정대부로 승계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신 책봉으로 김윤백의 후손들은 포상규정에 명시된 '자손승음유급후세(子孫承蔭宥及後世, 자손이 대대로 음직을 이어받고 사면·허통의 혜택이 후세까지 미침)'에 따라 관직 진출의 길이 열렸으며, 자손 대대로 음직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다.


김한태(金漢泰, ?~?)

김여경의 장남으로, 『울진장씨대동보』와 『일성록(日省錄)』에 김준태(金俊泰)로 기재되어 있어 초휘가 준태(俊泰)임을 알 수 있다. 숙종대에 음직으로 관직에 나아가 자헌대부(정2품)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부친 김여경의 가선대부(종2품) 증직과 조부 김영환의 통정대부(정3품) 증직도 김한태의 자헌대부에 따른 소급 증직으로 추정되나,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다.
한편, 『일성록』 정조 14년(1790) 1월 2일의 기사에서 노직(老職)을 가자받은 인물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해당 기사의 원춘도(原春道, 강원도) 양양(襄陽) 항목에 '사서인(士庶) 자헌대부 김준태 등 7인(襄陽 士庶資憲金俊泰等七人)'으로 그 이름이 적혀 있다. 따라서, 관직 은퇴 이후 장수하여 노직 숭정대부(종1품)의 가자를 받았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참고문헌】 『종가실록』, 『경주김씨파보』, 『울진장씨대동보』, 『일성록』


김경희(金景喜, 1769~1812년)

초휘는 도철(道喆)이다. 강릉함씨 족보에는 '경복(景福)'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경희(景喜)'의 오자인 듯하다. 김도철은 『일성록』 정조 22년(1798) 10월 3일의 기사에서 그 이름이 처음 언급되는데, 해당 기사는 강원 감사 김이익(金履翼)의 보고를 병조가 정조에게 상신(上申)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해당 기사에서 이르기를, 김도철이 마병(馬兵)에게 시행한 도시(都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법전에 따라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줄 것을 병조가 상신하였고 정조가 이를 재가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 강원도의 마병으로 1800년(정조 24) 경과정시별시(慶科庭試別試) 무과 전시(殿試)에 직부전시(直赴殿試) 대상으로 올랐으나 상경 중 병이 깊어져 응시하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결국, 그 다음 해인 1801년(순조 원년) 32세의 나이로 병과 85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전력은 마병이었다. 이후 선전관을 지냈으며, 이 무렵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종가 기와집이 12칸, 논이 482마지기, 밭이 202마지기에 노비는 7명이었다고 전한다.
1804년(순조 4) 영동지방에 발생한 대형 산불로 종가와 집안의 모든 문서가 전소하여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양양으로 내려와 양양부 관아에 소지를 제출하는 등 피해를 복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참고문헌】 『일성록』, 『승정원일기』, 『종가실록』, 『숭정3신유하이정종대왕제향세실경과정시문무전시방목』


김상화(金商華, 1789년~?)

초휘는 주화(胄華)이며, 자는 화실(華實)이다. 김도철의 차남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참고문헌】 『양양군지』


김동만(金東萬, 1867~1930년)

호는 사헌(思軒)이다. 통정원백(通政元伯)의 후손으로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이 되었다.
【참고문헌】 『양양군지』

사월댁(沙月宅)으로 분가한 김여경의 6대손 김상학(金商學)의 차손으로, 음직으로 1891년 은계도찰방에 올랐으며, 1892년에 도원도찰방(桃源道察訪)으로 옮겼다. 양양군지의 통정 원백은 통정대부 김윤백을 말하는 것으로 '元伯'은 '允白'의 오자로 판단된다. 김윤백의 공신 책봉에 따른 승음(承蔭) 혜택이 그 10대손인 동만에게까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문 내에서는 찰방 어른(察訪公)으로 불렸으며, 『경주김씨세보』에 기록하기를, "성품이 산수의 즐거움을 좋아하여 두리(斗里) 청룡(靑龍) 불당재(佛堂峙)에 이름을 새겼으며, 아울러 '반월(半月)', '반룡(盤龍)', '영빈대(迎賓坮)' 등의 바위 이름을 새긴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해당 각자 바위가 종가 동쪽 불당재에 남아 있다.


김성제(金聖濟, 1871~1927년)

복골댁(福洞宅) 김상혁(金商赫)의 장남으로, 학문과 의술에 뛰어나 당시 명사(名士)들이 많이 따랐으며, 산수를 즐겨 시문집이 있었다. 강원 양양군 현남면 후동리에서 태어나 현산학교 교사로서 한문과 수학을 전담하여 한말 인재양성에 힘을 다하였으며, 천품이 쾌활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산학통편(算學通編)에 능숙하였다. 만년에는 한의로서 사회사업에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양양군지』, 『경주김씨세보』, 『일제강점기 의생 총목록 1』


김규민(金圭民, 1926~1983년)

새강댁 김진열(金𣈆烈) 어르신의 3남으로, 현남면 두리 태생이다. 양양군 공무원으로서 1968년부터 1975년까지 현남면장을 역임하면서 지역발전에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양양문화원